[천자 칼럼] '소년병'의 눈물

입력 2018-06-24 17:39  

고두현 논설위원


6·25 때 낙동강 방어선의 최후 보루였던 포항과 기계·안강 지구. 파죽지세로 남하하던 북한군을 육탄으로 저지한 격전지다. 당시 군번도 없고 계급도 없는 소년병들이 대거 참전했다. 16세 김창중도 그중 한 명이었다. 굶기를 밥 먹듯 하며 40여 일을 미친 듯이 싸웠다.

총 한 자루밖에 없는 소년병들이 북한군 장교를 생포해 국군에 넘기기도 했다. 가까스로 승리한 뒤 강원 고성까지 밀고 올라갔다. 전투가 소강상태에 접어든 어느 날 ‘소년병 귀환 명령’을 받고 돌아보니 함께 사선을 넘은 14~17세 동료 73명이 대부분 보이지 않았다.

국군 3사단 후방사령부가 있던 포항여중에서는 학도병 71명이 장갑차를 앞세운 북한군에 맞섰다. 이들은 총알이 떨어진 뒤에도 맨주먹으로 적의 수류탄을 되받아 던지며 11시간 동안 버텼다. 그 덕분에 낙동강 전선을 지킬 수 있었다. 피란민 20여 만 명도 형산강을 무사히 건넜다.

이때 71명 중 48명이 죽고 23명이 실종되거나 다쳤다. 당시 서울 동성중 3학년이던 이우근(17)은 못다 쓴 편지를 가슴에 안은 채 전사했다. “적병은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는 겨우 71명입니다.(…) 꼭 살아서 가겠습니다. 상추쌈이 먹고 싶습니다.(…) 아! 놈들이 오고 있습니다. 어머니 안녕! 아~ 안녕은 아닙니다. 다시 쓸 테니까요.”

인천상륙작전을 앞두고 동해안 장사상륙작전에 투입된 소년병들의 사연도 눈물겹다. 적의 관심을 분산시키기 위한 양동작전이었다. 부대원 772명은 10대 학도병으로 보급품도 사흘분밖에 없었다. 배(문산호)가 태풍으로 좌초하는 바람에 상륙하기도 전에 집중 포화를 맞았다. 적은 낙동강 전선의 주력부대를 이곳으로 돌렸다. 1주일간의 전투에서 소년병 139명이 전사하고 92명이 다쳤다. 적의 전사자는 270여 명으로 두 배나 됐다.

이들처럼 6·25에 참전한 소년병은 2만9614명이다. 이 가운데 2573명이 목숨을 잃었다. 살아남은 소년병 중에는 군번이 없어 휴전 후 다시 입대하기도 했다. 2011년 국방부가 ‘6·25 전쟁 소년병 연구’를 펴내기 전까지는 존재 자체를 인정받지 못했다. 18세 미만 징집은 국제법상 불법이기 때문이다.

이들을 위한 보상법안은 16~19대 국회에 4차례 발의됐으나 폐기됐다. 20대 국회에 재발의됐다. 현재 생존자는 2000명 안팎이다. 세상을 떠나거나 몸이 불편한 이들이 많아 숫자는 갈수록 줄고 있다.

지난주 소년병전우회 주최로 낙동강승전기념관에서 열린 위령제에는 ‘백발의 소년병’ 70여 명이 참석했다. 먼저 간 넋을 기리며 ‘전우야 잘 있거라’를 부르는 노병들의 뺨을 타고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들의 나이는 벌써 80대 중반을 넘었다.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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